대학사계

나는 내 전공 분야 강의 외에 교양에 가까운 과목을 두 개 가르친다. 하나는 한국경제, 다른 하나는 세계경제에 관한 것이다. 자연 이 두 과목에서는 현실 경제에 관한 내용을 많이 다루고, 이론, 제도, 역사가 뒤섞여서 등장하게 된다. 그만큼 수업 준비하기도 힘들다. 그런데 정작 학생들은 내 강의를 들으며 ‘널널하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한다. 두서없이 주워 담은 것처럼 보이는 강의 내용도 그렇거니와 진담과 농담, 이론과 현실의 경계를 시도 때도 없이 넘나드는 나의 강의 방식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막상 시험을 한번 보고 나면 모두들 ‘사람 잘못 봤다’는 식으로 안색이 달라진다. 경제학 공부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이 현실 경제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점을 그들이 깨닫는 순간이다.

학생들의 현실감각에 도움이 되라고 가끔 외부 손님을 수업에 모셔다 특강을 듣는다. 달리 부탁을 하지 않아도 제 발로 찾아와 해 주겠다는 사람들도 많다. 이런 분들에게는 마음 다치지 않게 아직 대기자가 많아서 그러니 잠시만 기다리라고 한다. 그 잠시라는 것이 평균 몇 년은 된다. 수업 중에 하는 강의라 어차피 자주 하기 힘든데다가 내가 제시하는 초빙 강사의 조건이 매우 까다롭기 때문이다. 나는 크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하는데 뒤로 갈수록 어려워진다. 우선 첫째 조건은 강의 주제에 관해 나보다 많이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찌 보면 지당한 말씀인 이 부분은 모두들 쉽게 넘어선다. 안 그러면 강사로 고려할 이유가 없으니까. 둘째 조건은 조금 더 어렵다. 나보다 강의를 재미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내 강의에 와주는 분들은 나와 친분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에 내 유머감각이 평균은 조금 넘는다는 점을 대충 알고 있다. 그래서 이 조건을 제시하면, 겉으로는 자신 있다 말하지만 속으로는 약간 당황해한다. 세 번째 조건은 정말 어렵다. 그런데 이 조건 때문에 아쉽게도 훌륭한 분들을 우리 수업시간에 모실 수 없다고 말하면, 학생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이 마지막 조건은 ‘강사가 나보다 잘생겨야 한다’라는 것이다.

외모에 관한 평가는 주관적이기 때문에 그냥 내가 양보를 하고 더 이상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 내가 언급한 두 번째 조건을 못내 마음에 걸려 하는 분들이 더러 있었다. 한번은 아는 것도 많으시고 인품도 점잖으셔서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경제연구소장을 모셨는데 행여나 학생들이 지루해할까 봐 농담도 좀 하시라고 미리 귀띔을 했다. 그런데 이분이 내 말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았다. 당시는 외환위기 무렵이어서 YS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김영삼씨가 대통령이었는데, 이분의 경상도식 발음을 놓고 농담을 한 것 까진 좋았다. ‘갱재’가 어렵다’ 식의 아재개그식 표현이 주는 감동이 크지는 않았다. 당시 세대가 그렇듯 남녀 차이를 배경으로 한 농담도 하셨는데 학생들은 우습다고 박수를 쳤지만 정작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별것 아닌 표현이지만 미국에서 교수생활을 할 때부터 학생에게 수치심을 줄 수 있는 단어는 사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익혀온 나로서는 조금 걱정이 되었다. 다행히 이분의 다음 농담들은 본인 본연의 성격에 맞게 건전하고 재미없었다. 아마 여대에 와서 강의를 하는 김에 뭔가 여성과 관련된 농담을 준비하려다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우리 학교를 찾는 외부인들 중 상당수는 아직도 ‘여학생만 다니는 곳’이라는 점을 의식하는 경향이 있다. 제도적인 제약 때문에 남학생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정작 이곳 구성원들은 그런 남녀구분에 별 관심이 없다. 그저 다 똑같은 학생일 뿐이다. 

말이 나온 김에 덧붙이자면, 아마 역대 대통령 중에 YS만큼 우스개 얘기의 소재로 자주 등장한 경우가 드물 것이다. 그만큼 친근감을 준다는 의미도 되지만, 외환위기를 막지 못했다는 불만이 간접적으로 섞인 측면도 있다. 내가 선호하는 농담 하나를 소개한다. ‘YS가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러 미국에 갔는데 인사 정도는 영어로 하고 싶었다. 주변에서 몇 가지만 외우면 된다고 했다. 클린턴을 보면 “How are you?”라 묻고, 그가 “I’m fine, and you?” 하고 되물으면 그냥 간단히 “Me too!”라 말하면 된다는 것이다. 정작 클린턴을 만나 인사를 하려는데 그만 첫 단어가 생각이 잘 나지 않아 “Who are you?”라고 말했다. 당황한 클린턴이 YS가 농담을 거는 줄 알고 자신도 농담조로 “I am Hilary’s husband.”라고 답했다. 그러자 YS가 기다렸다는 듯이 “Me too”라고 했단다…’

사실 이백 명이 넘는 학생들을 앞에 놓고 강의하다 보면 누구라도 긴장이 된다. 동시에 이들을 한번 웃겨보고 싶다는 욕심도 생긴다. 한번은 한국은행에 근무하는 박사가 왔었는데 환율과 같은 전문적인 얘기를 하다가 갑자기 엉뚱한 쪽으로 얘기가 새기 시작했다. 급기야 난데없이 ‘악당들일수록 딸이 예쁘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마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이런 외부 특강을 듣는 학생들이야 원래 웃어줄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조금만 이상한 표현이 나와도 반응을 보인다. 모두들 깔깔 웃어대는 가운데 어떤 학생이 말을 받았다. “어, 박사님 틀렸습니다. 우리 아빠는 악당이 아닌데요!”  

반드시 잘 알려진 사람들만 강사로 부르는 것은 아니다. 한번은 신문에서 정말 잘 쓴 기사를 읽고 글 쓴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강의를 부탁했다. 전혀 모르는 친구였는데 그 정도 글을 쓸 수준이면 무슨 말을 해도 우리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일로 인해 그 신문사 편집국이 잠시 웅성거렸다고 한다. 신문사에 가보면 대개 칸막이가 없는 넓은 공간에 고참부터 초보 기자까지 다닥다닥 붙어 앉아 바쁘게 시간들을 보낸다. 그런데 국장도 아니고 부장도 아닌 말단 평기자가 특강 강사로 초대를 받았으니 화제가 될 만도 했었을 것이다. 또 한 번은 평소 친하게 지내던 후배뻘 기자를 부른 적이 있다. 뭐, 실력 때문이라기보다는 총각이고 잘생겼기 때문에 ‘자격’이 된 것이다. 학생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이 친구는 앞을 똑바로 바라보질 못했다. 계속 창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거나 한 쪽 구석에 앉아있는 나만 바라보며 싱거운 강의를 했다. 그날 이 친구,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저녁자리로 옮겨가 밥을 술에 말아먹었다.

아무리 좋은 강의도 오래 듣다 보면 집중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농담이나 잡담을 적당히 섞는 것이 좋은 강의를 만드는 비결이다. 물론 이게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내가 학생들로부터 제일 듣기 싫어하는 얘기 중 하나가 ‘한 학기가 지나면 뭘 배웠는지는 기억이 안 나고 교수님이 해준 농담만 생각난다’라는 말이다. 그래서 학기 초가 되면 이번에는 가급적 본론에 충실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하지만 생각만큼 잘 지켜지지 않는다. 그런데 한번은 본론에 아주 충실하게 강의하는 원로 교수님을 강사로 모셨다. 남 앞에서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말버릇이 조금씩 있기 마련이다. 이분은 뭔가 강조하고자 할 때 ‘말하자면’과 ‘이를테면’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셨다. 맨 뒷자리에 앉아있던 나는 오랜만에 옛 은사님 강의를 들으며 대학시절의 추억으로 빠져들었다. 박수소리에 놀라 깨어보니 강의가 끝나고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이 강의에서 두 문제 정도 시험에 낸다고 학생들에게 약속을 했는데 강의 내용을 기억할 수 없었다. 그래도 약속은 지켜야 했기에 객관식 문제를 냈다. ‘문제1: 이 교수님이 입고 오신 옷은? (1) 흰색 정장, (2) 감색 싱글, (3) 자주색 더블, (4) 한복. 문제2: 이 교수님의 강의에서 가장 많이 나온 단어는? (1) 경기침체, (2) 노사관계, (3) 말하자면, (4) 세계경제.’ 수업에 들어오지 않았으면 풀기 까다로운 문제임은 틀림없었다.   

이 외에도 외국인들을 포함 여러 사람들이 다녀갔다. 수업 중에 하는 자원봉사 강의이므로 금전적 보상은 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원칙이다. 대신 강의를 마치며 학교 마크가 찍혀있는 행주치마를 선물로 드리는데 모두들 매우 흡족해하면서 그 자리서 입어 보곤 했다. 아마 이분들도 자신의 말을 경청하는 학생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훌륭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사실 이런 이유 때문에 모두들 바쁜 자기 시간을 내가며 무료로 강의를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딱 한 번 차갑게 강의를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어떤 모임에서 어느 분이 자신이 새롭게 개발한 아이디어가 있다고 자랑을 하길래 그렇다면 언제 우리 학생들에게도 한번 그 얘기를 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좋다고 하더니, 내가 강사료는 따로 못 드린다고 하니까 화를 벌컥 내면서 거절했다. 자신이 이런 지적 재산을 형성하는데 많은 공을 들였는데 이것을 누군가가 사가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당한 말씀이었다. 사실 나도 외부 강연을 할 때 강사료를 따질 때가 있다. 일종의 자존심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끔은 공짜 강의도 한다. 실제로는 돈보다 더 소중한 형태의 대가를 받아 남는 장사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남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제일 걸리기 쉬운 병이 ‘독선’이다. 누군가 내 얘기를 듣는다는 것은 나보다 못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전달하는 지식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갖게 되기 쉽다. 하지만 배움의 길은 멀고, 그 끝은 무한대라 할 수 있다. 내가 조금 더 먼저, 더 많이 배웠다고 나의 지식이 완전한 것은 결코 아니다. 외부에서 온 분들이 내 학생들을 가르치는 모습을 지켜보다 보면, 새삼 내가 세상을 이해하는 방식이 최선이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현실은 꾸준히 진화해 가는데 한번 정착된 이론은 그 자리에 머문다. 내 스스로 공부하지 않으면 현실과 동떨어진 이론을 학생들에게 가르칠 확률이 높아진다는 얘기다. 공부가 본업인 학자가 세상을 천방지축 쏘다니는 것도 곤란하지만, 너무 한 울타리에 스스로를 가두어 놓는 것도 좋은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 수업에 외부 손님이 오면 정작 최고의 자극을 받는 것은 나 자신인 것 같다 (1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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